2010 - 05 - 01
일명 "아정포", 세계 아고라 정의 포럼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한 카페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토론 사이트 구축 프로젝트가 중단된 지도 어느새 반 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 카페 덕분에 본격적으로 전파를 타게 된 "사이버 망명"이라는 말은, 지금도 언론기사나 블로그 등에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사이버 망명"이라는 화두를 처음 띄운 것은 2008년 7월의 한겨레신문 기사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언론과 주요 포털에 소개된 것은 아정포 카페가 생겨난 2009년 3월 이후이다.) 특이한 소재에 불과하던 "사이버 망명"이라는 개념은 어느새 대한민국 일상 용어의 일부로 자리잡은 모양이다. 한글 위키백과에도 같은 이름의 페이지가 있을 정도다. (별 내용은 없다.)
이 "사이버 망명" 이야기가 최근 많이 시들해졌다. 지난 가을 아정포의 분란으로부터 비롯된 망명 사이트 제작 중단 결정 탓이 가장 크겠지만, 2008년 여름 우리 사회의 한복판을 장악했던 다음 아고라의 전체적인 침체 분위기도 한몫을 하고 있다. 검열과 차단에 저항하다 결국 굴복하고 만 건지, 알바 수색 작전에 힘이 빠져버린 건지, 아니면 서로 티격태격하다 모두 진저리가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2010년 봄 현재, 아고라에서 예전의 열정을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대안 모색보다는 불만 표출이, 긍정적 해결책보다는 씁쓸하게 비꼬는 태도가 먼저 눈에 띄는 현실이다. 개정 저작권법, 전기통신기본법, 인터넷 실명제 및 사이버 모욕죄 도입이 점점 그 효과를 발휘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사이버 공론장이 권력자들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 초토화되는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던가?
[최종 수정: 2010년 8월 5일]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2008년 여름부터 운영해 온 네티즌 망명지를 두 달 전 걸어닫았다. 1년 7개월만이다. 모든 데이터는 gadfly의 사이트로 이전되었다. 나름 개편을 하기 위해 만들던 프로그램과 스킨도 gadfly에게 그대로 넘겨줘 버렸다. 그러나 거기는 Tor가 없으면 접속이 불가능하고, Tor를 설치한다 해도 무척 느리고, 자주 오류가 발생하는 탓에 (이건 미완성 프로그램을 넘겨준 내 탓이기도 하고, 그걸 그대로 사용한 gadfly의 탓도 있다 ㅡ.ㅡ) 아무래도 예전의 네티즌 망명지처럼 공개된 게시판보다는 이용률이 심하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왜 문을 닫아야만 했는가? 문 닫기 열흘 전인 2월 16일에 올린 공지글에서는 관리의 어려움이라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진짜 이유는 (1) 더이상 망명지를 이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2) 그나마 가끔씩 올라오는 글도 굳이 망명사이트에 쓸 필요가 없는 성격의 글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네티즌 망명지를 오픈한 것은 2008년 촛불정국 당시 아고라에서 삭제의 위협을 받는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권력자들의 일방적 검열에 불과하던 상황은 미네르바 사건을 거치면서 겁을 먹은 네티즌들에 의한 자진검열로 바뀌었다. 자진검열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에 "삭제의 위협을 받는 자료" 따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러한 자료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티즌 수사대의 마지막 대활약은 2009년 5-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논의들이었다. 그 후에는 자진검열이 강제검열을 넘어섰다.
망명지 운영 초기에, 공지글로 올렸는지 다른 누군가의 대화 도중 나온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더이상 네티즌 망명지가 필요없는 날이 온다면 지체없이 문을 닫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을 뿐이다. 만약 망명지 게시판이 계속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깟 권리침해 신고 따위, 며칠에 하나쯤 처리해 줄 시간은 충분했다. 단,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할 가치도 더이상 없었을 뿐이다. 미련은 없다. 다른 사이트에 데이터가 모두 보존되고 있으니 딱히 누군가에게 미안할 일도 없다. 정말 중요한 자료를 올리고 저장할 곳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Tor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수고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 정도의 수고와 배움을 원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충분히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사이버 망명은 그만큼 절실한가?
...라는 제목의 글이 두어 달 전 아고라에 올라왔다. 아고라 경제토론방에서 이름을 날리는 논객 "담담당당"님의 글이다. 좋은 글이니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담담당당님은 "망명"이라는 개념이 그의 단골 레퍼토리인 십진법과 이진법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며 어떠한 혼란을 야기하는가를 중심으로 글을 쓰셨다. 개인적으로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애매한 부분도 있으나, 몇 달 지난 글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기는 뭣하니... 이 글에서는 "망명" 바로 앞의 단어, "집단"이라는 부분을 한 번 풀어 보려 한다.
인터넷의 힘은 크게 두 군데에서 나온다.
이것은 인터넷이 지방 분권 체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전세계에는 수백만 대의 서버와 수십억 대의 PC가 있고, 그 중 어떤 서버들은 다른 서버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인터넷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서버나 기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13개의 루트 서버 클러스터를 모두 파괴하면 인터넷은 멈춰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루트 서버는 전화번호부일 뿐이므로, 실제 컨텐츠를 통제하지는 못한다.) 국가, 기관, 기업들도 자신이 관리하는 네트워크를 부분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중국도 자국 내 인터넷을 100%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이버 공간에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예전에 내가 아정포 카페에 올렸던 망명 사이트 타산지석 리스트에서도, 위에 링크한 담담당당님의 사이버 망명 성적표에서도, 벤치마킹의 대상은 늘 아고라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8년 5월까지의 아고라가 된다. 사이버 망명의 깃발을 들었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아고라와 같은", 또는 "아고라와 비슷한" 온라인 공간 개설을 원했다. 해외로 망명하지는 않았으나 최초의 아고라 대안 사이트였던 아고리언, 그 후 생겨난 구글 망명지, 네티즌 망명지, 아정포 카페가 추구했던 망명 사이트, 그리고 진알시의 주도로 현재 베타테스트 중인 이룸 사이트도 어김없이 왕년의 아고라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베스트도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추천 방식도 유사하다. 필요에 따라 특별한 요소가 추가될 뿐이다. 아고라 사용자들이 얼마나 쉽게 "이민"갈 수 있느냐가 마치 그 사이트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문제는 아고라와 비슷한 인터페이스가 아니다. 생긴 거야 아무래도 좋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죽어가는 아고라 토론방을 대체할 시스템을 찾아나선 우리 모두가 인터넷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버려둔 채, 아고라의 인터페이스뿐 아니라 아고라가 상징하는 중앙 집권 체제까지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이다. 무슨 소린지 알고 싶으면 계속 읽어 보시라.
아고라와 같은 공론장은 다음커뮤니케이션이라는 기형적 대형포털 시스템 아래에서만 가능한 컨셉이다. 다시 말하겠다. 건강한 사이버 공간이라면 아고라와 같은 사이트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고? 아고라는 매일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다음넷의 포털 트래픽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제일 먼저 다음넷 또는 네이버를 띄우고, 습관적으로 로그인한 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그 사이트 안에서만 맴돌며 아고라, 메일, 블로그, 카페, 지식검색, 뉴스검색, 동영상 감상, 음악 감상, 채팅, 쇼핑까지 뚝딱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기형적 사이버 공간의 전형이다. 대한민국의 포털에는 없는 것이 없다. 정말로 하루 종일 한 포털 안에서만 웹 서핑을 해도 아쉬운 것을 모른다. 덕분에 중소업체들은 포털에 빌붙어 살거나 포털에 매각되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포털들은 자사 서비스를 이용하여 생성된 컨텐츠를 언제나 검색 상위에 배치한다.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하지 않으면 네이버 검색 상위에 뜰 수 없고, 다음 카페를 이용하지 않으면 다음 검색 상위에 나오기 어렵다. 재벌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공룡 포털의 특성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오직 포털만을 이용하도록 유도한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 다음, 네이버 ID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가입하기조차 어려운 재외국민이나 외국인은 어김없이 2등 네티즌 취급이다. 이러한 독점 체제 덕분에, 구글, 야후, MSN, 중국의 "바이두"에 이어 대한민국의 네이버가 세계 검색엔진 순위 5위다. 좋은 소식일 수도 있는데, 씁쓸한 것은 나뿐일까.
제왕적 포털의 독점 행태는 우리 나라의 다소 폐쇄적인 온라인 문화 때문에 더욱 힘을 받는다. 외국의 예를 들어 보자. 구글도 안 하는 것이 없다. 검색, 메일, 채팅, 블로그, 뉴스, 쇼핑, 심지어 요즘은 핸드폰도 만들어 팔더라. 그러나 구글에서 검색을 하고 구글 메일을 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구글 블로그를 개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블로그 서비스가 한두 개도 아닌데 말이다. 구글 "그룹스"는 카페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게시판 하나가 그만이다. 아고라? 미디어다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구글은 자사 서비스를 이용하여 생성된 컨텐츠가 아니라고 절대 차별하지 않는다. 구글에서 검색 한 번 하고 원하는 링크를 클릭하면 어느새 구글이 아닌 다른 사이트를 방문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MSN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검색엔진 Bing도 마찬가지다. 클릭 좀 하다 보면 어느새 다른 사이트에 와 있다. 다음이나 네이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요새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트위터는 해외 웹 서비스의 모범답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위터는 오직 한 가지 서비스만을 제공한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를 이용하여 단문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트위터 메일, 트위터 카페, 트위터 쇼핑, 트위터 아고라 따위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트위터가 제공하는 그 한 가지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포털도 아닌 트위터를 일부로 찾는다. 한국의 트위터를 표방하는 미투데이는 어떤가? 이건 뭐, 네이버의 수많은 문어발 중 하나이다.
구글 아고라, 트위터 아고라 같은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국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라서 광장에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천만의 말씀. 아고라는 20년 전 피씨통신 시절의 BBS에다가 스킨만 입힌 거니까? 이것도 맞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열린 토론장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특정 기업에 종속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생태계를 고사시키는 공룡 포털의 트래픽에 의존하는 주제에 네티즌 주권을 외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 번 찾아보기 바란다. 촛불집회 이후 생겨난 수많은 온라인 그룹들 중, 다음 카페가 아닌 것이 과연 몇 개나 되는지!
아래는 네티즌 망명지 오픈 초기, 정확히 말하면 2008년 8월 8일에 S모와 주고받았던 메일의 일부이다. S모는 6월 말부터 해외에 기반을 둔 망명 사이트 개설을 목표로 나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오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지연되는 동안 내가 먼저 오픈한 것이 exilekorea.net이었다.
요즘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입니다. 거꾸로 되었다구요? 거꾸로가 맞습니다. 이제 우리 네티즌들은 흩어져야 삽니다. (중략) 한 군데에 모두 모여 있으면 눈길을 끌게 마련입니다. 시선이 집중되면 일망타진당하기 딱 좋습니다. 이제는 여기저기로 흩어져야 할 때입니다. 촉수 하나를 잘라내면 수십 개가 더 자라나는 외계 괴물처럼, 걷고 뛰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자취를 감추는 기습 시위대처럼, 자신을 분열시켜 증식하는 아메바처럼,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 어디에나 꽃을 피우는 민들레 씨처럼, 그렇게 유연하게 검열 시도에 맞서 끊임없이 온라인 포럼을 재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렵에도 어느 정도의 아이디어는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방 분권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최근에야 절실히 깨달았다. 우리 네티즌들은 우리의 가장 큰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사실상 저들이 통제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연전연패한 것이 당연하다.
한 자리에 100만 명이 모여서 ○○퇴진을 외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일거에 소탕하기에는 그게 훨씬 쉽다. 현 정권은 그나마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기에 이 정도지, 30년 전의 폭군은 호남의 어느 도시 전체를 포위하고 진압해 버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면, 각 지역에 분산되어 게릴라 시위를 벌이면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진압 병력이 분산될 뿐더러, 상황 파악조차 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도 오프라인에서는 많이 모이는 것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좀 모여 주는 것이 좋은데, 온라인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중앙 집권 체제를 갖고 있는 공권력 앞에서 중앙 집권 시스템의 게시판에 의존하는 것은 어서 와서 통제하고 진압해 달라고 초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정보의 생산주체가 전국에 분산되어 있더라도, 몇 개의 대형 게시판에게 유통망을 독점당했다면 진정한 인터넷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것은 포털이 아닌 비영리단체로 사이트 하나를 새로 만든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그 사이트가 네트워크 전체의 SPOF (single point of failure) 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거기만 차단하면 싸그리 망하는 거다. 그래서, 아정포에서 논의하던 사이트 제작 계획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이제는 나도 인정해야겠다. 아고리언, 이룸, 그리고 그 밖의 대안 사이트들도, 만약 아고라와 같은 역할을 자처할 계획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잘못되었다.
인터넷 통제 시도는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나 이란 같은 독재국가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영국, 프랑스, 호주 등에서도 최근 앞다퉈 인터넷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악질 저작권법의 원조가 바로 미국이다. 테러범 추적을 핑계로 대면 영장이 없어도 마구 도청이 가능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터넷 덕분에 표를 많이 벌었다고 인터넷 통제를 풀어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중앙 집권 체제를 추구하는 국가 권력은 지방 분권 체제의 인터넷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균형을 잡을 뿐이다. 따라서 해외 망명 사이트라는 것도 어쩌면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거기 다 모여 있으면 통제하기 정말 쉽다.
어느 한 국가의 어느 한 기업이 운영하는 어느 한 게시판에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사이트에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있는 돈 다 털어서 어느 한 종목에 올인하지 말라는 말이다. 국내, 해외, 포털, 개인 사이트, 블로그, 카페, 가리지 말고 분산투자하기 바란다. 그래야 어느 한 종목이 급락해도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하다. 그래야 어느 한 사이트에 통제의 칼날이 들어와도 다른 곳에서 이어나갈 수 있다.
권력 기관이 아고라 한 군데를 모니터하는 것은 쉽다. 아예 포털이 발벗고 나서서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해 준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언제 생겨났는지도 모르는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서로 다른 페이지를 모니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니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인터넷은 물(水)이다. 막히면 돌아서 흐르고, 만약 심하게 막혔다면 깎아내 버리고 흐른다. 이러한 인터넷의 속성을 무시하고 어느 한 게시판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물이 고여 마침내 썩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지나치게 경직된 "집단"은 퇴화하게 마련이다. 집단의 정체성이 유연하게 바뀔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고라에 모여 있으면 어떻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어떤가. 다 같은 물이라면 언젠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것을.
여기서 질문이 들어온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사이트에 분산되어 활동한다면 아고라와 같은 공론장의 기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게다가 누가 그 많은 사이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토론에 참여하겠냐고. 공룡 포털의 독점적 행태가 아니꼽기는 하지만, 그게 편리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고. 편리한 One-Stop 포털 시스템에 익숙해진 네티즌들이 여기저기 찾아다니기를 기대하지는 말라고.
맞는 말이다. 그리고 아까 얘기하면서 빼놓은 점이 있는데, 외국 네티즌들도 수십 개의 사이트를 매일 찾아다니며 놀지는 않는다. 미네르바가 블로그 하나 덜렁 만들어 놓고 글을 썼다면 조회수 30만을 기록하지는 못했을 터! (예전에 조회수 1백만 넘는 아고라 글도 보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주 특별한 형태의 사이트들이 외국에는 몇 개 있다. 누가 어디에 글을 올리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사이트들 덕분이다. 이른바 소셜 북마크 (social bookmarking) 또는 소셜 뉴스 (social news) 사이트들이다. 대표적으로 디그 (Digg), 딜리셔스 (Delicious), 레딧 (Reddit) 등의 미국 사이트들이 있고, IT 정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슬래시닷 (Slashdot)도 유명하다. 이러한 사이트에 올라오는 게시물들의 특징은... 본문이 없고 댓글과 추천수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이게 바로 소셜 북마크 또는 소셜 뉴스의 특징이다. 제목을 클릭하면 글쓴이가 원래 글을 올려 놓은 블로그 또는 게시판으로 연결되는데,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댓글은 원래 사이트에 올려도 되고, 소셜 북마크 또는 소셜 뉴스 사이트에 모아도 된다. 수만 명의 네티즌들이 각자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좋은 정보를 찾아 Digg, Delicious, Reddit 등에 링크를 걸어 두면, 다른 네티즌들도 그 정보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링크된 컨텐츠에 대한 댓글 토론도 가능하고, 링크를 추천하면 일종의 "베스트"에 올라가서 더 많은 네티즌들이 볼 수 있게 된다.
국내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운영하는 사이트로는 Delicious를 벤치마크한 마가린, 그리고 Digg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이는 브레인, 점피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이트들이 크게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나마 다음에서 링크해 주는 다음 뷰 (블로거뉴스),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종종 등장하는 블로터 등이 방문객을 모으고 있지만, 공룡 포털의 트래픽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블로터는 얼마 전 인터넷 실명제 적용 대상이 되자 댓글을 막는 것으로 실명제를 우회했다.)
다음과 같은 장점을 들 수 있다. 작년 가을 아정포 카페에 올렸던 "우리가 만들어가는 뉴스, 검색"이라는 글에서 내가 제안했던 것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현재로서는 다음과 같은 단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사용자가 어떤 웹 브라우저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단점들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는 있다. 최근 네이버에서 캠페인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한 인터넷 익스플로러 8 (IE8)이라든지, 전세계 네티즌의 30% 이상이 사용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ActiveX (아~놔!) 탓에 이용률이 미미한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 등의 웹 브라우저들은 한층 향상된 보안 덕분에 모르는 사이트를 방문할 때도 해킹의 걱정을 다소 덜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최근에 나온 웹 브라우저들은 대부분 "탭" 기능을 지원하는데, 이것을 잘 이용하면 여러 사이트를 왔다갔다하는 것도 훨씬 편해진다. 아직 사용해 보지 않았다면 탭을 꼭 써보기 바란다. Ctrl 키를 누르면서 링크를 클릭하면 새 창이 아닌 새 탭에서 볼 수 있다.
어쩌면 소셜 북마크, 소셜 뉴스 서비스의 불편함은 여전히 익스플로러 6 (IE6) 시장 점유율이 50%에 육박하는 대한민국 사이버 공간의 특징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2010년 여름 현재, 제작사인 MS조차 "9년 전 썩은 우유"라고 비하한 해킹천국 IE6의 전세계 시장 점유율은 15%에 불과하다. 이 중 대부분은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꺼리는 기업 사용자들이라고 한다. 윈도우 XP를 사용한다면 위에 링크한 최신 웹 브라우저들을 꼭 확인해 보기 바란다. IE8은 ActiveX를 비롯하여 국내 사이트 대부분과 100% 호환된다. 구글 크롬은 속도가 빨라서 저사양 PC에 강력 추천한다.
사이버 망명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것은 없다. 공룡 포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정보의 생산자, 유통자,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조금씩 되찾아가는 것 뿐이다. 글을 많이 쓰는 분은 블로그 하나쯤 만드시라. 요즘은 어딜 가도 클릭 몇 번만 하면 된다. 국내에는 각 포털과 티스토리 등이 있고, 해외에는 Wordpress.com, Blogger.com, LiveJournal, Tumblr, TypePad 등의 무료 서비스가 있다. 메일 주소만 입력하면 블로그 개설이 가능하고, 일부는 한글 서비스도 제공한다. (한글 서비스를 하지 않는 곳에서도, 글의 내용은 한글로 쓰든 산스크리트어로 쓰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게 많이 쓸 일이 없으면 트위터나 미투데이 등의 마이크로블로그 (단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미니홈피가 있다면 폴더 하나를 전체공개로 해두고 거기다 써도 된다. 어디에 올려 놓든, 인터넷에 올려 놓고 링크만 걸면 된다. 블로그 사용자들이라면 이미 친숙한 "트랙백"과 RSS을 비롯하여, 요즘은 공개된 API를 이용하여 블로그와 트위터 사이에 얼마든지 정보 공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서로 다른 사이트의 서로 다른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연락이 두절될 일은 없다. 사용 방법을 조금만 배우면 된다. 정말 절실하다면 좀 배우시라.
남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국내의 카페24, 해외의 DreamHost, HostGator 등 저렴한 웹호스팅 서비스를 이용하여 내 블로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요즘은 홈페이지를 만들 줄 모르는 사람도 호스팅 회사에 가입하고 몇 번 클릭만 하면 블로그 하나 뚝딱 나온다. 참고로 이 블로그는 미국의 NearlyFreeSpeech.NET에서 호스팅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에 딱히 쓸 만한 소셜 북마크, 소셜 뉴스 사이트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몇몇 포털들이 시도해 보기는 했으나, 인터넷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소셜 북마크라는 개념 자체가 폐쇄적인 포털 환경에 적합하지 않았던 탓인지 대부분 문을 닫거나 포털 서비스에 삼켜져 버렸다. 위에 링크한 소규모 서비스 몇 개가 그나마 몇몇 사용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유명한 소셜 북마크 사이트인 Reddit의 소스코드가 죄다 공개되어 있다는데, 누가 그거 좀 손질해서 한글로...? ^_^;;
2008년 1월 14일, 톰 크루즈가 출연하는 사이언톨로지 동영상 한 편이 유튜브에 유출되었다. 미국의 SF 작가 론 허바드가 1950년대에 창시한 사이언톨로지는 막강한 자금력과 연줄을 바탕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침투하고 신도들을 등쳐먹는 등 악명이 높은 종교집단인데, 아니나다를까 그 유튜브 동영상도 사이언톨로지가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는 바람에 삭제되고 말았다.
한편, 미국판 디씨인사이드라고 할 수 있는 4chan에는 /b/라는 이름의 게시판이 있다. 대략 디씨의 막장갤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게시판에서는 모두가 익명(Anonymous)이다. 줄여서 아논(Anon)이라고들 부른다. 사이언톨로지 동영상 삭제 사건이 이 게시판 터줏대감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삘~을 받았다.
1월 21일, 아논의 이름으로 유튜브에 동영상 한 편이 올라왔다. 사이언톨로지의 부정행위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1월 27일에는 Call to Action이라는 제목으로 또다른 동영상이 올라왔는데, 2월 10일 세계 각지에서 사이언톨로지 반대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동영상을 제작한 익명의 네티즌은 사이언톨로지가 붕괴될 때까지 반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명 "Project Chanology"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아논의 선전포고와 시위 공지는 수많은 블로그와 소셜 북마크 사이트들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황한 사이언톨로지 측이 수습을 시도했을 때는 이미 수백 개의 사이트에 시위 공지가 올라간 후였다. 모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월 10일, 전세계 90여의 사이언톨로지 교회 앞에 약 7천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사이언톨로지가 반대자들을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히는지 익히 들은 시위대는 하나같이 브이 포 벤데타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평화적인 시위는 3월과 4월에도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었고, 1년이 넘도록 1인 시위의 형태로 이어졌다. 사이언톨로지 외에도 사이버 공간의 검열과 통제를 시도하던 이란과 호주 정부를 상대로 한 온라인 시위도 아논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멤버들은 사이언톨로지 웹 사이트를 해킹하고 사무실을 더럽히는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고, 사이언톨로지 측은 이러한 불법 행위를 빌미삼아 아논을 깎아내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심지어 평화적 시위에 참여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시위자를 쫓아가서 사진을 찍고 괴롭히는 불법 행위를 사이언톨로지 측이 앞장서서 저질렀다는 주장도 있다.
스케일이 다소 작다는 차이가 있지만, 아논의 활동은 비슷한 시기 아고라를 중심으로 한 우리 나라의 촛불 시위와 비슷한 점이 꽤 많다. 눈에 띄게 잘못된 정책 또는 집단에 대항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난 움직임이 오프라인 시위로 이어졌다는 점, 특별한 주도 세력 없이도 꽤 오랜 기간 그 정체성이 유지되었다는 점, 일부의 불법 행위가 역공의 빌미를 주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아논의 본거지(?)가 딱히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고라 촛불의 동력이 떨어진 것도 꼭 검열과 통제 때문만은 아니다. 단지 지쳤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2008년 5월 이전의 아고라로 돌아간다고 해서 예전의 열정도 살아나리라는 것은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노인의 추억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이상적인 형태의 어느 망명 사이트로 이동한다고 잃어버린 동력이 확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2년 전 아고라가 보여준 놀라운 가능성에 아직 희망을 걸고 있다면,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준다. 인터넷은 아직 어리니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서로의 경험에서 배우면 언젠가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인터넷의 힘은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과 작전이 아닌, 지방 분권 체제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나온다. 중앙 집권의 조직에서 만들어낸 이벤트와 달리 온라인 공간의 자발적 움직임은 오래도록 이어지고, 흐름이 끊기더라도 참여자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다. 깊이 새겨진 그 마음은 적절한 기회가 있으면 오프라인에 표출되어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선거 때 말이다. 이러한 인터넷의 성격은 건전한 시민 운동의 성격과도 일치한다. 일상생활에서 출발했기에 일상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드는 습관이다.
인터넷은 민주주의이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인터넷을 두려워한다.
또다른 "아고라 클론"을 만들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사이트들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로 발명한 금속 활자는 (우리 나라가 13세기에 "세계 최초"로 발명했지만, 구텐베르크도 "서양 최초"라고는 인정해 주자) 그 때까지 귀족과 성직자들만 갖고 있던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어 훗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후반에 개발된 인터넷은 그 때까지 권력자들과 기존 언론의 전유물이던 정보(information)를 누구든지 생산 및 소비할 수 있도록 하여, 소수의 이익을 위한 세뇌와 통제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데 폭넓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인터넷이 점점 열려갈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금속 활자로 인쇄된 근대 지식이 널리 퍼지자, 위기를 느낀 로마의 교황청은 금서 목록을 만들고 갈릴레오를 잡아가두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기억하자. 정보는 지식의 바탕이고, 지식은 곧 권력이다. 정보의 민주화는 곧 권력의 민주화를 의미하기에, 어느 사회든 기득권 세력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건 대한민국의 정부도 마찬가지이고, 중국과 북한의 공산당 세력도 마찬가지이며, 미국의 사이언톨로지와 다국적기업들도 전혀 다르지 않다. 중세 유럽의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까지는 200여 년의 전쟁과 혁명을 거쳐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얼마나 노력할 의지가 있는가?
먼 훗날,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가 인터넷 자유의 최고점이었고 그 후에는 무관심과 편리함의 유혹 탓에 점차 쇠퇴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