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법과 십진법, 그리고 집단망명

2009 - 09 - 05

아정포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우선, 담담당당님의 글을 감히 몇 구절 인용하겠습니다.

한국적 환경에서 이런 정도의 오프라인 교감은 당연한 거다.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또 그를 통해서 서로를 강하게 확인하려는 속성도 있다. 거꾸로 이것은 누구든지 그렇게 확인될 수 있다는 불안으로 존재한다. 철저한 익명을 원하는 예에서는 그렇다. 그런 참여자는 온라인에서 절대 자신의 이미지를 강하게 만들면 안 된다. 딱 그 수준, 누구도 자신을 공격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그쳐야 한다. 더 들어가면? 한국의 이진법은 십진법이 개입한다. 이진법의 자유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잃은 듯한 국면이다. ... (중략) ... 이진법을 십진법으로 끌어들여 모두 분해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냥 그 영역이 그래도 나름 유지되는 게, 아슬아슬 하지만 오늘 대한민국 온라인 토론의 모습이다. 기형(奇形)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모습을 여기서도 보려나?그럼 떠나는 게 옳은 거다.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너너나님의 아이덴티티 문제뿐 아니라, 아고라를 멋대로 쥐락펴락하는 일명 "알바"들의 행패, 그 사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사정,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이진법 세계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정권의 의도까지, 각각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다수의 사건들을 종합하여 쓰신 글이기에... 담담당당님의 긴 글에 대한 어설픈 평론 연습 따위는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문맥 밖으로 한 문단 뚝 끊어놓고 무작정 잡아뜯으려고 하면 자폭밖에 더 하겠어요? ㅡ.ㅡㅋ

다만, 방문자수가 재적회원의 50%에 육박할 만큼 부쩍 활동이 늘어난(?) 우리 회원분들께... 아고라 얘기도 말고, 짜증나는 알바 얘기도 말고, 곤혹스러운 나너너나님 얘기도 말고, 그저 우리 "세계 아고라 정의 포럼" 카페에 대해 한 가지만 여쭐까 합니다.

질문 : 우리 카페가 표방하는 가장 큰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회원분들이 "집단망명" 이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아, 이제 보니 제가 구라를 쳤군요. 한 가지만 여쭈겠다고 해놓고, 슬그머니 질문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질문 : 무엇을 위한 망명입니까?

상당수의 회원분들이 "아고라에 가해지는 부당한 정치적 압력을 피해서" 또는 그와 비슷한 맥락의 대답을 하십니다. 어르신들께 자꾸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질문 하나만 더 드리겠습니다.

질문 : 그 부당한 정치적 압력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습니까?

제 질문에 또 제가 대답합니다. 자의적 가위질, 친정부 성향의 게시물 특별우대정책, 사이버 모욕죄, 개정 저작권법, 허위사실 유포죄,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권력기관에 제공하여 처벌받도록 하는 포털... 즉, 우리의 신체와 재산과 자유와 인권에 대한 무차별적 침해 행위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카페가 표방하는 가장 큰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체와 재산과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위에 나열한 것과 같이 파렴치한 행위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넷을 떠나 우리가 주체가 되는 다른 사이트를 개척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해외망명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매스미디어의 쌍벽을 이루는 일간신문과 공중파 방송이 모두 정권과 재벌의 손에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지금, 정보의 교환을 누군가가 자의적으로 통제하기가 "비교적 어려운" 인터넷을 이용하여 2008년 여름 불타올랐던 촛불의 힘을 다시 키워보려는 야심을 갖고 계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조작되는 정치, 경제 정보에 휩쓸려... 남 좋은 일만 해주고 마는 현실이 지긋지긋하여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거나... 최소한, 손해를 줄이기 위해... 여기에 계신 분도 있겠지요.

누구에게 이끌려 오셨든, 어떤 목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든... 아정포에 오셨다면 적어도 이 카페 안에서만은 망명사이트 구축이 가장 큰 숙제이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위에 나열한 파렴치한 행위들, 우리가 떨쳐버리고자 하는 정책들의 근간을 이루는 악법 중의 악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터넷 실명제" (일명 제한적 본인확인제)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사이버 모욕죄도 허위사실 유포죄도 마구잡이 가위질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의원이나 ○○○장관을 모욕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처벌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니예요? 대한민국의 정치가들은 무식한 차단 시스템으로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중국 정부보다 머리가 좋은 모양입니다. 사후처방 가위질만으로는 자기들이 싫어하는 컨텐츠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가 없으니까, 실명제라는 막강한 무기를 사용하여... 해당 컨텐츠의 최초 유포자를 찾아서 처벌하기 쉽도록 만들었습니다. 전국민이 각자의 글을 사전검열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다 알아서 검열해 주니 정부 입장에서도 얼마나 편하겠어요? 사이버 모욕죄와 허위사실 유포죄와 검열과 삭제가 해줄 수 없는 초특급 정권보호 서비스를 인터넷 실명제가 뚝딱 해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MB 취임 전부터 있었던 법을 살짝 손본 거니까 구실도 좋지요.)

민주주의 국가들 중, 사이버와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모욕 그 자체로 징역감이 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100% 옳은 말만 했더라도 듣는 사람이 기분나쁘면 3년간 콩밥을 먹어야 합니다. 구라가 섞였다면 5년으로 늘지요.

민주주의 국가들 중, 허위사실 유포를 징역감으로 취급하는 나라도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허위사실을 통해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당연히 배상해야 하지만, 이건 민사소송꺼리이지, 형사처벌감이 아닙니다.

하긴, 위와 같은 정책들은 "명예"에 대한 우리 민족 특유의 관념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명예"의 개념은 서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니까요. 그런데... "제한적 본인 확인제"를 실시하는 나라, 즉 인터넷 사용에 실명을 요구하는 나라는 민주국가와 독재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에서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검열천국 중국에서도 안 해요.

이것도 그저 우리 문화의 특성이겠거니 하고 넘어가야 됩니까? 인터넷 공간의 민주화에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더 큰 악영향을 끼치는 정책인데?

미국 연방대법원은 1995년 이후 여러 판결문에서 익명으로 말할 권리를 헌법의 기본 정신 중 하나로 인정하였습니다. (다른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허구의 프로필 뒤에 숨어 정치적 글을 게시함으로써 반대여론을 달랜 몇몇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미국 헌법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연방대법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물론, 잘못한 것이 없다면 무엇이 두려워 이진법의 아바타 뒤에 숨어 지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께 묻습니다. 님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아닌지를 누가 판단합니까? 님 혼자서 판단합니까? 부패한 정권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판단하고 님을 탄압하더라도 계속 똑같은 입장을 유지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아고라에 다른 어떤 MB악법보다도 더 치명타를 먹여버린 이 인터넷 실명제라는 것은 이진법 세상과 십진법 세상 사이의 관계에 대해 특정한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그 무언가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통제하고 조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잘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영역은 현금과 4대강과 삽과 부동산이 있는 십진법 세상입니다. 뭐가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도 로그인이 안 되는 이진법 세상은 그들의 영역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걸려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을 가장 쉽게 배우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정권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하는 이진법 세상을 통제하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확실하게 통제 가능하다고 자부하는 십진법 세상의 아이덴티티와 죄다 연결해 버리면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도가 있겠으나, 인터넷 실명제 정책의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우리 삽질정권의 IT 정책은 우리의 신체와 재산과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데 가장 큰 위험이 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도 비슷한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참, 아까 드리려고 했던 질문은... 저 혼자 질문하고 답한 세 가지 항목이 아니라, 아래의 한 가지입니다.

지금의 논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으로 볼 때... 사이버 망명길을 떠날 자세는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까?

반복합니다.

사악한 의도로 만들어낸 개념임을 알면서도, 자꾸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세뇌됩니다...............

※ 현재 일어나고 있는 나너너나님의 신분 논란에는 물론 다른 요소들도 많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진법과 십진법의 문제는 그 중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큰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태그 : 아정포, 이진법, 십진법, 나너너나, 담담당당, 집단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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