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정포 사이트 제작, 포털은 없다

2009 - 09 - 05

아정포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대안사이트, 국민포털, 다음넷이 긴장탈 만한 작품을 만든다면서 어째 그만한 사업규모에 버금가는 조직력, 인력, 사업계획이 나오지 않느냐고 불안해하시는 분들이 적잖이 있는 줄로 압니다.

비슷한 문제로 얼마 전 받았던 질문에 제가 드리려고 했던 답변을 조금 다듬어서 여기에 올립니다. 더 기다렸다가는 공개적으로 답변을 드릴 공간마저 남아나지 않을지도 몰라서... ㅠㅠ

어떤 종류의 사이트를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를 놓고, 아직도 제가 분명히 설명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나 봅니다. 처음부터 다음, 네이버, 구글, 야후 같은 "대형 포털" 하나를 만들겠답시고 수천 페이지 분량의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동원하고... 그렇게 시작하여 성공한 "포털"은 도무지 본 적이 없습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10여년전 그냥 단순한 "한메일" 서비스 하나로 시작하여 서서히 기능을 추가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른 것입니다. 처음부터 카페와 아고라와 블로그가 다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이디어는 있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단지 머릿속 한 구석의 아이디어일 뿐, 소수의 창립자들이 처음 만들어낸 것은 메일 서비스를 위한 시스템 설계도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세계적 포털인 "야후"도 10여년전 사용자들의 즐겨찾기(?) 링크들을 긁어모아 마치 간단한 온라인 전화번호부처럼 시작했던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현재 세계 2위의 검색포털이 되었습니다.

2억 5천만 회원을 거느린 미국판 싸이월드, "페이스북"은 어느 하버드 대학생이 "우리 기숙사 얼짱 찾기" 또는 "섹시한 언니 뽑기" 이런 컨셉으로 친구들끼리 갖고 놀려고 뚝딱 만든 것이 5년만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포털"을 만들겠다고 덤비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포털이란 누가 뚝딱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처음엔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개성있는 서비스 한두 가지로 시작하여 점차 들어오는 사용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것저것 확장시켜 가다 보면 나름 특색을 가진 "포털"이든 "돼지털"이든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누군가가 이미 정해둔 목표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과 아이디어들이 부딪히며 자연스럽게 "진화"해가는 과정입니다.

풍수 좋은 들판에 한두 사람이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근처에 자기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됩니다. 그러나 일명 "계획도시"라고 부르는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첫 번째 집을 지은 사람이 도시 전체를 설계한 예는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아이디어뿐입니다. 첫 번째 집을 짓는 사람은, 자기 집에 닿는 길과 그 주위의 작은 논밭만 정성스럽게 일구어 놓으면 됩니다.

도시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걸리는 오프라인과 달리, 너무나 빨리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리는 인터넷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대의 커뮤니티로 성장한 "페이스북", 우주정거장의 비행사들도 사용한다는 미니블로그 "트위터" 등은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의 서비스들이지요.

지금 우리가 10년 후 다음과 경쟁할 만한 포털을 만들겠다고 10년간의 사업계획을 세워 그대로 진행한다고 쳐봅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5년만 지나도 원래 사업계획의 아이템들은 더이상 아무 쓸모도 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리지 않을까요? 만약 그 아이템들이 워낙 뛰어나서 10년 후에까지 히트를 친다고 해도, 원래의 계획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처음에 나너님이 "다음넷을 사버리자", "국민포털로 바꿔버리자"는 등의 제안을 하셨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발전, 변화하여 지금에 이르렀기에, 여전히 "다음넷 같은 포털을 만든다"는 생각이 많이 남아 있는데... 곰곰히 따져보면 그건 미친짓입니다. 이미 여러개 있는 포털이랑 똑같은 것을 뭐하러 또 만듭니까?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터넷 문화의 획일성을 조장하는 그런 포털은 싫습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아이템 하나, 처음에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규모의 계획을 세우는 데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2년 후, 3년 후, 4년 후에 추가될 아이템들은 지금은 단지 아이디어만 갖고 있으면 됩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얼마 전 우리 아정포 집단망명방에서 피터님이 제안하셨던 아주 간단한... 그러나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그럭저럭 쓸만한... 첫 움막입니다. 그런 움막을 지을 만한 설계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재료가 충분하면 움막 하나 더 지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 움막이 도시로 발전할 때까지 처음의 식구가 계속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처음 입주했다고 큰소리치며 평생 사이버 독재자 및 도시계획자 노릇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나치게 큰 계획은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정직했다면, 계획 변경과 시행착오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초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너무 잘 진행된다면 온실 속에서 자란 그 프로젝트를 저는 경계하겠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니까요 ㅋㅋㅋㅋ

지난 3월 14일에 제가 무명학생님의 도움으로 카페에 처음 쓴 글, 거기서 몇 마디를 발췌해 올리겠습니다.

아고라가 불안하여 대안을 찾고 계신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50페이지의 사업계획서와 1천 페이지의 종합계획서가 아닙니다. 엑소더스에 필요한 것은 아무도 다 읽지 않을 1천 페이지의 서류가 아니라 x86 아키텍처에서 당장이라도 실행 가능한 1만 줄의 프로그램 코드, 그리고 그 코드를 바탕으로 작품 하나를 꾸려나갈 몇 사람의 동지와 약간의 시작자금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히 아시는 분 있으면 손 들어 보십시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젊어서 그런가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며 일을 해나가며 현실과 부딪혀 가며 서서히 알아나가야 하는 것이지, 한 박스짜리 종합계획서와 향후 10년간의 사업계획을 작성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동안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 네티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아직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무엇을 원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는 간단하게나마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거창한 계획만 평생 작성하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또 흐지부지되느니 차라리 열심있는 분들이 지금이라도 행동에 돌입하여 또다시 시행착오를 겪어갈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50페이지의 사업계획서와 1천 페이지의 종합계획서는 서서히 완성될 것입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만약 나중에 누군가가 눈치채더라도 그건, 계획서가 아닌 결산서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정포 선생님, 형님, 누님, 아우, 친구 여러분....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지요. 혹시 대한민국 0.1%의 막강한 자금과 영향력으로 만들어진 초특급 호텔급 포털에 입주하기를 원하셨습니까? 기대수치를 조금만 낮추심이 어떨는지요. 제가 실물경제 쪽은 전혀 모릅니다만 ㅡ.ㅡ;; 목표 수익률을 살짝 낮춰 잡으면... 상품 선택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지 않던가요?  (예를 잘못 들었나 ㅠㅠ)

태그 : 아정포, 사이트, 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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